2009년 04월 28일
주먹이 운다. 그리고 피해자도 운다.
최민식, 류승범이 주연을 한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출신이지만 지금은 형편없는 퇴물이 되어 아내에게 버림 받고 빚더미에 올라 앉아 과거 복싱 후배에게 빚 대신 매를 맞는 처량한 신세의 태식, 그에게는 아직 그를 믿고 있는 아들 하나가 유일한 희망인데, 태식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를 짓누르는 빚을 갚기 위하여 마지막 인생을 걸고 다시 신인왕전에 나갑니다.
그리고 길거리 건달로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상환. 합의금 마련을 위해 강도를 하다 결국 소년교도소에 수감되고 그를 뒷바라지 하던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지요. 상환은 소년교도소 안에서 복싱을 배워보지만 결국 할머니마저 병으로 쓰러지고 그에게 이제 믿을 거라고는 신인왕전에 나가 우승을 하는 일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반드시 우승해야만 하는 태식과 상환은 우여곡절 끝에 신인왕전 결승에서 맞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늘 주인공에게만 모든 시선을 집중하지 패배한 상대방이나 주인공의 활약에 죽어가는 수 많은 적들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게 이름 없이 쓰러진 적의 가슴주머니에도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자식의 가족사진이 한 장씩은 들어있는 법이죠. 그들에게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와 그들의 승리를 응원하는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 모두를 주인공으로 하여 공평한 시선을 부여함으로써, 자칫 한 주인공에게만 집중될 수 있는 관심과 시선을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분산시킨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류 감독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지낸 복서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면서 각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만일 한 경기에서 붙는다면...이라는 발상에서 기획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링이 아닌 재판정에서는 어떨까요?
맹자의 '양혜왕'편에 보면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 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하루는 어느 사람이 제사에 제물로 쓰기 위해 소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왕이 보니 그 소가 너무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왕은 그 사람에게 소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그럼 제사를 폐하겠느냐고 하자, 왕은 그것은 아니고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나중에 이 말을 들은 맹자가 왕에게 그러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고, 왕이 그렇다고 하자 맹자는 ‘그럼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느냐..고 힐난하며 백성들이 왕의 그릇이 작아 소가 아까워 양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수근거리고 있는데, 난 당신이 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는지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왕 당신이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는 내용이지요.
위 고사는 사실 맹자의 인의정치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지만, 위 고사에서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부분이 참 맘에 와 닿습니다.
형사재판을 해보면, 형사법정은 민사법정과 그 분위기부터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은 구속 피고인이건, 불구속 피고인이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해주셔서 이번만 선처해주십시오”란 말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피고인이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 현재의 어려운 형편, 피치 못하게 죄를 짓게 된 이유 등을 정상 자료로 이야기 합니다. 듣고 있자면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았구나, 참 어려운 역경을 견디다 저런 죄를 짓게 되었구나,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하면서 딱한 생각이 들고 마음이 약해지고는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진술을 듣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달리 생각해보면, 판사들 역시 보이는 소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양은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여서 그런지, 형편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차용금 사기나 횡령 등의 범죄가 최근 많이 늘었습니다. 이런 사건의 재판을 하다보면 피고인이 돈을 갚고 싶어도 돈이 없어 갚지 못하는 어려운 경제적 사정들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눈을 피해자에게 돌리면, 아끼고 아껴서 피같은 돈을 믿고 빌려주었다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심정은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떼인 돈으로 가정불화가 생겨 이혼하는 집안부터, 당장 피해자의 집안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발생합니다.
과연 재판을 하는 판사에게, 당장 재판정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주인공 피고인은 불쌍하고, 저 재판정 뒷자리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분을 삭이는 보이지 않는 피해자는 불쌍하지 않은 것일까요? 물론 피고인을 엄벌에 처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피해자의 한 맺힌 가슴은 쓸어줘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링에서는 주먹이 울고 있을지 몰라도, 재판정에서는 고개를 떨군 피고인 뒤에 피해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들 모두에게 공평한 시선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P.S 이 글은 몇 년 전 쓴 '주먹이 운다' 영화 평을 바탕으로 최근 심정을 첨가하여 다시 쓴 글입니다.
# by | 2009/04/28 08:56 | 법조 마당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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