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7월 18일
주먹이 운다
"하루는 어느 사람이 제사에 제물로 쓰기 위해 소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왕이 보니 그 소가 너무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왕은 그 사람에게 소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그럼 제사를 폐하겠느냐고 하자, 왕은 그것은 아니고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나중에 이 말을 들은 맹자가 왕에게 그러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고, 왕이 그렇다고 하자 맹자는 ‘그럼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느냐?고 힐난하며 백성들이 왕의 그릇이 작아 소가 아까와 양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수근거리고 있는데, 난 당신이 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는지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왕 당신이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는 내용이다.
위 고사는 사실 인의정치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지만, 위 고사에서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부분이 관심을 끈다.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과 상대편에 대한 관객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해진다. 특히 전쟁영화나 스포츠 영화를 보다 보면 갖은 고생 끝에 정상에 서게되는 주인공에게 관객의 모든 감정은 이입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궁금했던 것은 주인공과 맞서는 상대방은 피땀 어린 훈련과정이 없었을까? 꼭 이겨야만 하는 가슴아픈 사연은 없었을까? 그를 응원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뜨거운 눈물은 없었을까?하는 점들이었다.
전쟁영화를 보다보면 적군은 그저 오락실 화면에서 내가 빨리 지워버려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하게 그려지지만, 간혹 반전메시지를 담은 전쟁영화 중 적군의 품속에서 발견한 한장의 가족사진과 편지들을 슬쩍 비춰주며 이렇듯 쉽게 죽어가는 적군들도 다 가족이 있고 치열한 삶이 있는 사람이었단 암시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 순간적으로 적군에 대한 무한한 동정심을 느끼게 돼버린다. 소와 양을 다 보게 되면 소든 양이든 누구도 죽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바로 그런 영화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출신이지만 지금은 형편 없는 퇴물이 되어 아내에게 버림 받고 빚더미에 올라 앉아 과거 복싱 후배에게 빚 대신 매를 맞는 처량한 신세의 태식, 그에게는 아직 그를 믿고 있는 아들 하나가 유일한 희망인데, 태식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를 짓누르는 빚을 갚기 위하여 마지막 인생을 걸고 다시 신인왕전에 나간다.
그리고, 길거리 건달로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상환. 합의금 마련을 위해 강도를 하다 결국 소년교도소에 수감되고 그를 뒷바라지 하던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는다. 상환은 소년교도소 안에서 복싱을 배워보지만 결국 할머니마저 병으로 쓰러지고 그에게 이제 믿을 거라고는 신인왕전에 나가 우승을 하는 일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결국 태식과 상환은 우여곡절 끝에 신인왕전 결승에서 맞붙는다.......
내가 바라던 참 좋은 스토리다. 영화는 태식과 상환이 결승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한 편에 치우침 없이 균형잡힌 시각으로 냉정하게 묘사한다. 류승완 감독 영화가 다 그렇듯 지독히 사실적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가 이기게 될지에 관한 궁금증을 이미 초연하게 만들어버린다. 누가 이기든 둘 다 이미 승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를 끝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
실제로 이 영화는 류 감독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지낸 복서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면서 각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만일 한 경기에서 붙는다면...이라는 발상에서 기획됐다고 한다.
그래 사실 현실로 들어오면 누구나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누구든 져서는 안되는 싸움을 하고 있지만 결국 승자와 패자는 나뉘게 마련이고 져서는 안되는 싸움을 지고난 패자의 슬픔은 승자의 환호성에 묻혀버린다.
개인적으로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응원해야 하는 부담 없이 적도 없고 아군도 없는 승부를 지독하게도 리얼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특히 내 맘에 든다. 내가 보았기 때문에 불쌍하고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없는 그런 승부는 이미 신물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는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도 좋지만 때로는 이런 지독한 영화로 속을 후비후비 긁어 함 청소해 주는 것도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극장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안타까운 영화.
사족 1 : 최민식과 류승범의 연기대결은 복싱대결 못지 않게 승부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다.
사족 2 : 변희봉과 나문희는 이제 비중있는 조연으로서 어설픈 주연들은 그 무게감만으로도 위축될 수준의 최고수가 된 느낌.
# by | 2005/07/18 13:54 | 영화,연예 마당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라도, 재판정에서는 고개를 떨군 피고인 뒤에 피해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들 모두에게 공평한 시선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P.S 이 글은 몇 년 전 쓴 '주먹이 운다' 영화 평을 바탕으로 최근 심정을 첨가하여 다시 쓴 글입니다. ... more